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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부정공>쇄연당처사공휘기하묘갈명(灑然堂處士公諱器夏墓碣銘)
灑然堂處士公諱器夏墓碣銘 猗我宗黨前輩風流聞望可歷數而知惟詠歸翁之是父是子是交遊之盛何其彬彬也同根則素菴侍郞晩休承宣道溪小監是巳師友金渼湖尹屛溪兩先生是己諱器夏公以咏歸公第二子蚤游諸賢門亟被獎翊而平日慕先烈象前賢不欲負所學乃其素志耳嘗因玉川謙川兩院祠衆論敦迫於是戾落而二竪乘之矣竟復於旅邸實元陵己卯五月二十二日也距明陵辛巳六月二十日享五十九春秋其喪歸也京鄕士友嗟悼之情見於哀詞誄文者無慮累百篇而金相國在魯尤爲之致惜焉是年九月五日葬于所居本面大龜前峴乾阡公字大仲號灑然堂吾趙肇高麗檢校侍中諱璋其後虔谷先生諱瑜以松京舊臣恥食二栗我太宗朝徵不膺命南遯順天之富有縣爲子孫世庄 世宗朝前副正之表閭 肅宗朝士林之祭社皆在此自是家風逡巡廉靖不喜進取往往雖通仕籍盖儻來者也孝友文行未必多讓於人故相好公之篤倫三灘公之潜德民到于今稱之由三灘以來若通德郞時聖其曾孫泰望之至行幷侈綽偰孰謂芝醴之曾無根源也通德公子維綱生之蕃之珣曰泰望即詠歸翁長房出曰重望季房出曰文化柳氏通德郞景昌女曰長澤高氏參奉傅礪女寔公本生及所後考妣孺人許氏籍陽川父綊莊淑有壺儀先公生三載後公十五年而歿窆同壙無嗣嗣同胞兄生員公崇夏子聖淳焉亦儒雅克家二女適金圭大薛弘迪孫載根澤根邦根出後曾玄不盡述謹按公志氣英爽性且篤厚事兩庭無間言與兄友篤兄沒悲語曰兄若還生我當割臂自幼擩染基本己立而及長又從當世師儒名公資益弘多爲學不抱抱於詞章惟以辦事竪名自期每家畜善馬事或有緊急公輒騎自控一日兼數日行但執策僕夫踉蹌隨之患不能及云其豪爽如此然終于窮愁巷而不試異日欲修昇平誌者無跡可尋但見九龜之山廣川之水蒼蒼焉泱泱焉己矣良足慨然盖納銘乃克襄時事而未遑者垂二百年矣二房孫基永目見今日天地飜覆重以爲陵變谷還難保其必無惧莫之徵也俾寅錫識焉者將欲埋之也銘曰 生爲男子事四方事裏革轉壑惟我與比矯矯我公此其素志終南皐復戶庭同視事係慕賢浩然無愧人死屋裡可免入地噫昔伯鸞遺戒何以睠玆故山松栢交翠過者必戒孰不好懿 歲丁卯上巳日 同九葉孫 寅錫 謹撰 쇄연당처사공휘기하묘갈명(灑然堂處士公諱器夏墓碣銘) 거룩하도다! 우리 종당 전배의 풍류와 성망을 역력히 세어가며 알 수 있다면 그 가운데 영귀옹(詠歸翁)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의 교유(交遊)의 성대함이 어쩌면 그렇게도 유난히도 빛났던가. 동종으로는 소암시랑(素菴侍郎) 언신(彥臣), 만휴승선(晚休承宣) 명신(命臣), 도계소감(道溪小監) 익신(翊臣)이요, 사우(師友)로는 김미호(金渼湖), 윤병계(尹屛溪) 두 선생 이었다. 휘 기하공(器夏公)이 영귀당공(詠歸堂公)의 둘째 아들로 일찌기 여러 현인의 문하에 쫓아 놀며 자주 권장을 입었고 평일에 선열을 생각하고 전현을 법받아 배운바를 저버리고자 하지 않은 것이 본뜻이었다. 일찌기 옥천(玉川), 겸천(謙川) 두 원사로 인하여 여러 의논의 핍박이 큰지라, 이에 경락(京落)에 이르러 병환이 나서 여저(旅邸)에서 별세하시니 영조(英祖) 기묘년(一七五九) 五월 二十二일이니 숙종(肅宗) 신사년(一七○一) 六월 二十一일부터 생각하면 향년이 五十九세이다. 그 상거(喪車)가 돌아오니 경향 사우가 슬퍼한 뜻이 애사(哀詞)와 제문(祭文)에 보이는 자가 무려 백 편이었으나 상국(相國) 김재노(金在魯)가 더욱 애석히 여기었다. 이해 九월 五일에 사는 곳 대구 마을 앞고개 건천(乾阡)에 안장하였다. 공의 자는 대중(大仲)이요, 호는 쇄연당이며 건곡선생의 후손이고 삼탄공의 七세손으로 태망(泰望) 문화유씨 통덕랑(通德郎) 경창(景昌)의 딸과 장택고씨 참봉 부여(傅礪)의 딸은 공의 본생 및 소후 고비였다. 배는 양천허씨(陽川許氏) 협(綊)의 따님인데 씩씩하고 맑은 규범이 있고 공보다 三년 먼저 태어나 공보다 十五년 뒤에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합봉이다. 아들이 없어 백형 생원공 숭하(崇夏) 아들 성순(聖淳)으로 후사를 삼으니 유도(儒道)를 우아하게 집을 이었으며, 두 딸은 김규대(金圭大), 설홍적(薛弘迪)의 처였다. 손자는 재근(載根) 택근(澤根) 방근(邦根)인데, 방근은 출계하였고 증현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삼가 생각하건대, 공은 지기가 영특하고 명쾌하며 성정이 돈독하고 후중하여 살아계신 양가 부모를 섬기며 사잇말이 없고 형과 우애가 매우 독실하여 형이 별세하니 슬피 말하되, 『형이 만일 다시 살아 돌아오면 내 마땅히 팔뚝을 자르겠다.』 하였다. 어려서부터 선덕을 이어 기본을 세우고 장성하여 당세의 사유명공(師儒名公)을 쫓아 놀며 유익한 도움이 많았으며 학문은 말과 문장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일을 판단하여 이름을 세움으로써 스스로 기약하고 집에 좋은 말을 기르며 혹 긴급한 일이 있으면 공이 문득 말을 몰아 하루 또는 수일 정을 가는데 다만 채찍을 잡은 마부가 비틀거리며 따라와도 미치지 못할까 근심하였으니 그 호상(豪爽)함이 이와 같으나 마침내 임천(林泉)에서 마치고 시험하지 못하였으니 다른 날 승평지(昇平誌)를 편수하고자 하는 자는 자취를 찾을 길이 없고 다만 구구산(九龜山)과 광천수(廣川水)의 푸르고 푸르며 넓고 넓음을 볼 따름이니 슬프도다. 지명(誌銘)을 묻는 일을 장례 후 二백년이 되도록 이루지 못하였더니 二방손 기영(基永)이 오늘날 천지가 번복함을 목견하고 거듭 등성이가 변하여 골짜기가 되어 증빙 할 수 없을 두려움이 있음으로 인석(寅錫)으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여 묻고자 한다. 남자로 태어나 四방 일을 보며 生爲男子事四方事 가죽에 싸고 구렁에 궁구러져도 오직 의리를 따랐다. 裏革轉壑惟我與比 위의 있는 우리 공은 이것이 그 본뜻일세 矯矯我公此其素志 서울에서 몸을 마치며 호정과 같이 보았네 終南皐復戶庭同視 일이 어진이를 추모한데 달렸으니 공명정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도다. 事係慕賢浩然無愧 사람이 죽어 기식이 끊기면 가히 먼지를 털어버리고 땅에 들 것이다. 人死屋裡可免入地 아! 옛적 백란이 끼친 경계를 어찌 할꼬 噫昔伯鸞遺戒何以 이에 옛 산을 돌아보니 소나무와 잣나무가 서로 푸르네 睠玆故山松栢交翠 지나가는 자 반드시 경계할 것이니 누가 아름다운 덕을 흠모하지 않으랴 過者必戒孰不好懿 동(同) 九엽손(葉孫) 인석(寅錫)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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